韓國과 世界의 佛經展
 












































불교 전적은 어떻게 인쇄 간행되었을까 ? (불전 인경사)

高榮燮(동국대 불교학과 교수/미국 하버드대 아시아센터 한국학연구소 교환교수)

1. 불전의 전래

   불교 전적은 경장과 율장과 논장 및 교장을 총칭한다. 즉 붓다의 말씀(경전) 더미인 경장(經藏)과 붓다 상가의 규범(율전) 더미인 율장(律藏) 그리고 이들 경장과 율장의 해설서(논전) 더미인 논장(論藏) 및 이들 삼장의 주석서 더미인 교장(敎藏, 章疏)의 사장(四藏)을 가리킨다. 인도 산스크리트(梵語)의 속어인 마가다어와 쁘라끄리띠어로 주로 설해진 불법은 구전 암송되어 혼성 범어로 기록되었다. 이들 범본 불전은 다시 북방으로 전해져 한문 번역[漢譯]과 티벳어 번역[藏譯]이 되었으며 남방으로 전해져 파리어 번역[巴譯]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고대 사국시대에 인도와 중국을 통해 불교 전적을 수용했다. 고구려에는 전진에서 온 순도(順道) 법사의 초전(372) 이래 주로 한역 불전이 전해졌다. 백제에는 중국을 거쳐 온(384) 인도의 마라난타(摩羅難陀) 법사와 인도 유학을 다녀온(531) 겸익(謙益) 법사에 의해 범본(梵本) 불전과 북방의 한역(漢譯) 불전이 전해졌다. 가야에는 허황후의 오빠인 장유(長遊)법사의 이름만을 알 수 있을 뿐 어떠한 불전이 전해졌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신라에는 아도(阿道) 법사와 묵(흑)호자(墨/黑胡子) 법사의 전래 이래 진나라 입학승 명관(明觀) 법사, 국비유학생 안홍(安弘, 安含)법사, 당나라 유학승 자장(慈藏)율사에 의해 한역 불전이 전해졌으며(636), 또 통일신라 말에는 보요(普耀)선사가 오월국에서 두 차례나 대장경을 가져온 일이 있으며, 후당으로부터 묵(?)화상이 대장경을 가져온 사실이 있다. 해서 통일신라 불교인들은 이를 토대로 신행에 매진하였고 교학을 연구하였다. 남북국시대의 남국인 통일신라 시기에는 문아 원측(文雅 圓測, 613~196)의 『해심밀경소』와 분황 원효(芬皇 元曉, 617~676)의 『금강삼매경론』, 부석 의상(浮石 義湘, 625~702)의 『화엄일승법계도』 등 『한국불교전서: 신라시대편』(3책)에 수록된 저술들 대부분은 필사되어 읽히다가 8세기 이후 목판 인쇄술에 의해 판각되어 인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북국인 대발해에는 8세기 초반에 불전이 전해지고 후반에 당나라 유학을 다녀온 정소(貞素) 법사 등에 의해 불전이 번역되었다. 또 고려에는 성종 10년(991)에 한언공(韓彦恭)이 송(宋)나라로부터 들여온 480질(帙) 5,047권의 개보판(開寶板) 한역 불전들이 널리 보급되었다. 이들 불전에 의해 신행(信行)과 연찬(硏鑽)이 이루어졌고 성과물들은 목판에 의해 인쇄 출판되어 유통되었다. 고려 조정은 두 차례의 『고려대장경』 판각과 『고려교장』 편찬을 통해 한역 불전을 유통시켰고, 조선 조정은 현토(구결) 불전과 언해 불전을 인간하여 백성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2. 불전의 판각

   중국의 제지술이 고구려에 전래(593)되면서 불교인들의 저술 활동은 상당히 진전되었다. 한역 불전의 간행을 위해 진전된 목판 인쇄술은 7세기 경 중국에서 시작되어 740년경부터 동양과 서양으로 각각 전파되었다. 현존 기록상 목판 인쇄에 의한 가장 오랜 불전 인출은 경덕왕 10년(751) 이전에 제작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너비 8㎝, 길이 5m)으로 추정된다. 현존 세계최고의 목판 두루마리 인쇄물인 이 경전은 대개 한 줄 8자로 되어 있으며 경주 불국사 석가탑 제2층 탑신부의 사리함 속에서 발견(1966.10)되었다. 이 다라니경의 출간연대는 상한선을 700년대 초로, 하한선을 석가탑의 건립연대인 751년 경으로 보고 있다. 그 근거는 이 경문 속에 당(唐)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 집권기(15년)에만 통용된 뒤 자취를 감춘 신제자(新制字) 4글자(注[證] ·澍[地] ·全[授] ·葺[初])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글자 크기와 정밀도(精密度)에서 빼어날 뿐만 아니라 역사상으로도 종래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百萬塔陀羅尼經, 770년 간행)보다 20여년 앞선 것이다. 또 중국 돈황 출토의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868년 간행)은 글자를 뒤집어 새긴 목판이어서 장시간 보존할 수 있으며 무한정 찍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이것 역시 한 면에 모든 글자를 새기기 때문에 한 문헌밖에 찍어낼 수 없고 비용과 노력이 많이 든다는 단점이 있다. 반면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위의 두 인경보다 앞서 이루어졌고 지질(紙質)면이나 목판 인쇄에 의한 인경 형태면에서 한국 고인쇄문화(古印刷文化)의 높은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글자체를 한자씩 새긴 다음 그것을 모아 판을 짜는 인쇄술은 고려시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목판 인쇄술은 대장경 조성을 계기로 고려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초조본 『고려대장경』 조성은 고려 현종 2년(1011)에 대구 부인사(符仁寺)에 설치한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전담하였다. 현종 3∼4년(1012~1013)경에 거란이 쳐들어오자 조정에서는 진행해 오던 대장경 판각사업을 문명국으로서의 자존심과 우월감을 이웃 나라에 널리 알리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 동시에 붓다의 힘[佛力]에 의지하여 국민을 단결시키고 적병을 물리치기 위한 발원으로 이어지면서 대장경 조성은 급진전 되었다. 그리하여 현종 대에 시작된 사업은 덕종(德宗)대로 이어졌으며 문종(文宗)에 이르러 더욱 활발히 진행되어 선종(宣宗) 4년(1087)에 판각이 완료되었다.

   대장경의 조성에 이어 의천(義天, 1055~1101) 대사는 대장경에서 빠진 소초(疏?)류를 보완하기 위해 『고려교장』 편찬사업(1096)에 착수하여 1,010부 4,740권의 목판을 판각했다. 그러나 이 『고려교장』은 초조본 『고려대장경』과 함께 유라시아를 통일하고 고려로 쳐들어온 몽골의 별동부대에 의해 대부분이 불타 버렸다. 이후 고려 조정은 붓다의 힘에 의지해 국민을 단결시키고 몽골을 물리치기 위해 강화 용장사지(龍藏寺址)에 대장도감을 설치(1236)하고 강화에서 재조본 『고려대장경』의 판각을 시작했다. 이어 남해 및 진주 등의 분사도감에서 경판 조성을 지원하여 16년만인 1251년에 1,539부 6,805권의 대장경 정장(正藏, 正板)을 완판하고 부장(副藏, 補板)을 덧붙여 강화의 선원사지(禪源寺址)에 보존하였다. 이후 이 경판은 왜구의 침탈을 피해 조선 초에 해인사(海印寺)로 옮겨졌으며 현재 1,749종 6,571권 154,296판이 장경각에 보존되어 있다. 여기에서 판수(板數)는 대체적으로 한 판의 양 면에 새겨진 숫자를 가리키지만 더러는 한 판의 한 면에만 새겨진 판도 있다. 대장경 판목 총계가 81,137매(枚)의 양면인 162,274매가 되지 않고 154,296판이 되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고려 후기 이후에는 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판목에 의해 많은 불전이 인출 간행되었고 번역 유통되었다.


3. 불전의 인쇄

   고려 조정은 초기부터 비서성(秘書省), 수서원(修書院), 서적포(書籍鋪) 등을 설치하여 출판문화 정책을 세우고 실행하였다. 경적(經籍)과 축문(祝文)을 맡아보던 비서성은 국가출판기관의 역할을 하였다. 또 왕의 고서(庫書)로 설치(990)된 수서원은 많은 소장 도서를 신하들이 이용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국자감의 진흥책으로 설치(1095~1105)한 서적포는 도서간행에 힘썼다. 고려는 이들 관청을 통해 많은 도서를 간행, 보관하고 때로는 송나라에 수출하기도 하였다. 유학 경전과 불교 경전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목판 인쇄술이 발달하였고 송나라 판본의 유입은 인쇄물 간행을 더욱 촉진시켰다. 현재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오쿠라컬렉션에 소장 중인 고려 총지사(摠持寺)에서 통화(統和) 25년(1007) 간행한 『보협인다라니경』은 이 시기의 대표적인 목판 인쇄물이었다. 고려는 이같은 목판 인쇄술에 힘입어 금속활자를 발명하였고 이를 통해 불교 전적과 유교 전적을 간행하여 전국에 널리 유통시켰다.

   현재 보물 738호로 지정되어 있는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에는 1239년에 최이(崔怡)가 이미 간행한 금속활자본을 다시 새겨 목판본을 발간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근거하면 금속활자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종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 금속활자본으로 청주 근교 흥덕사(興德寺)에서 찍어낸(1377)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秒錄佛祖直指心體要節) 상하권(하권만 프랑스 국립도서관 보존)보다 138년이나 앞서는 것이다. 또 불전 이외에도 최윤의(崔允儀)가 쓴 『고금상정예문』(古今詳定禮文, 전 50권)은 1234년에 만든 구리활자로 인쇄되었다. 이것은 세계 최초로 알려진 독일의 쿠텐베르크보다 2백 5년이나 앞선 기록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사실은 고려의 문호인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기록만 남았을 뿐 그 원형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처럼 고려시대는 무인들이 정권을 오랫동안 장악한 시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쇄술의 발전과 도서의 보급에 의해 문인들의 시대를 열었다. 그 성취는 고스란히 조선의 몫으로 이어졌다. 조선 정부는 서적원(書籍院)을 두어(1392) 활자 주조와 도서 인쇄에 관한 일을 관장케 하였다. 조선 태종은 숭문정책을 널리 펴면서(1400년경) 전용주자소를 설치하였다. 서울 남산에 있던 왕립주자소에서는 조선 최초의 주조활자인 계미자(癸未字, 1403)를 선보였다. 서적간행에 관심이 매우 컸던 세종은 명을 내려 활자의 크기를 일정하게 하게 했다. 또 행과 행 사이에 줄을 넣어 당시만 해도 결점들이 적지 않았던 계미자를 개량하여 경자자(庚子字, 1420)를 만들어 내었다. 나아가 조판이 쉽고 인쇄하기에 편하며 필선이 아름다운 초주 갑인자(初鑄 甲寅字, 1434)를 다듬어 내게 했다. 이들 활자들에 의해 국한문 혼용의 『석보상절』(釋譜詳節)과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세종은 한글을 창제한 이후 불전 간행과 불서 편찬을 시도하였고 수양대군(세조)은 이를 도왔다. 뒷날 문종과 단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세조는 조카인 단종으로부터의 왕위 찬탈을 속죄하려는 마음에서 불교를 깊이 믿었다. 세조는 왕세자가 병으로 죽자 명복을 빌기 위하여 친히 불교 전적을 베끼고 여러 불전을 활자본으로 간행(1457)하였다. 세조는 재위 7년(1461)이 되자 왕명으로 고려의 대장도감과 교장도감을 원용한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10여종의 불전 언해본을 간행하였다.

   간경도감이 폐지된 이후에도 내수사 등이 잠시 불전을 간행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목판 인쇄술뿐만 아니라 금속활자로도 불교 전적들을 인간했다. 금속활자본은 목판 활자본과 달리 해당 글자를 모아서 판형을 뜬 뒤에 찍어내는 방식이다. 현존하는 『천태사교의』(乙亥字本), 『원각경』(언해 현토, 乙酉字本), 『대방광불화엄경』(入不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 乙酉字本) 등은 당시에 주로 읽힌 금속활자본 불전들이다. 이들 금속활자본에 의한 인간 작업은 공정이 더디지만 글자체가 선명하여 한동안 선호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이와 같은 금속활자본의 인쇄 방식은 대부분 중앙 정부에서 주도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금속활자는 여러 차례 개량되었지만 대부분의 불전들은 목판 인쇄로 간행되어 전국에 보급되었다. 16세기 이후에는 기존의 원간본(原刊本)을 다시 찍어낸 중간본(重刊本)이 대부분이었다. 이후에는 각 지역 관아(官衙)의 후원과 지방 사찰의 주도로 불전들과 불전 언해서들이 복각되었고 인간된 종수도 적지 않았다. 특히 『불설대부모은중경』의 경우는 1416년판 이래 조선후기 용주사판까지 국내에서 간행된 이판만도 수십 종에 이르고 있다. 또 『묘법연화경』, 『금강반야바라밀경』, 『육경합부』, 『화엄경소』, 『지장경』, 『다라니, 진언집』 등도 지방 관아와 지역 사찰들에서 여러 차례 인간되었다. 그리고 이들 판본들에 판각된 다양한 변상도와 아름다운 배경 처리는 조선시대 인쇄 미학의 백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4. 불전의 번역

   간경도감은 성종 2년(1471)까지 약 10여 년간 존속하면서 한문 불전 간행과 한글 번역 및 인쇄 간행을 주도했다. 간경도감은 한양에 본사(本司)를 두고 안동부, 개성부, 상주부, 진주부, 전주부, 남원부 등의 지방에 분사(分司)를 두었다. 직제는 도제부, 제조, 사, 부사, 판관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관리는 약 20명이고 총 종사자는 170명에 이르렀다. 이곳의 주요업무는 이름있는 승려나 학자를 초빙하여 『고려교장』본을 판각하는 것과 한글로 번역하고 인간(印刊)하는 일을 하였다. 아울러 불서를 구입하거나 수집하고 왕실의 불사와 법회를 관장했다. 목판의 판각과 간행에 따른 업무는 세조가 직접 관장하였고, 실무는 신미(信眉)? 수미(守眉)? 홍준(洪濬) 대사 등과 황수신(黃守身, 1407∼1467), 김수온(金守溫), 한계희(韓繼禧) 등의 학자가 맡았다.

   간경도감에서 편찬해낸 언해본 불교 전적들은 삼장(三藏)과 교장(敎藏) 모두에 걸쳐 있었다. 도감의 첫 간행물은 불교의 교조인 석존에 대한 저술들이었다. 먼저 승우(僧祐) 법사의 한문본 『석가보』(釋迦譜)와 『법화경』 등의 경전을 가려 뽑아 엮고 이를 언해하여 『석보상절』(釋譜詳節, 1477)을 펴냈다. 그런데 이 『석보상절』과 『월인석보』(月印千江之曲+釋譜詳節)는 다른 언해본과 달리 한문 본문이 없는 것이 특징이었다. 10여 년간 존속했던 간경도감에서는 『수능엄경언해』, 『아미타경언해』, 『몽산법어언해』, 『묘법연화경언해』, 『선종영가집언해』, 『금강반야바라밀경언해』, 『반야바라밀다심경언해』, 『원각경언해』, 『사법어언해』, 『목우자수심결언해 』 등 10종의 불전 언해서를 간행하였다.

이들 언해본들이 출간될 수 있었던 것은 여말 선초 이래 불전의 구결(口訣, 懸吐)본이 독서계에 이미 널리 소개되어 애독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불교 지성계가 이런 불경 경전에 대한 내용적 해석에 있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들 간행본들은 주로 선법(禪法)과 의례(儀禮) 관련 서적들이었다는 사실은 교단이 통폐합된 이후 선종이 주류였던 조선시대 불교의 지형도와 관련해서 주목해야할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유교의 사서(四書)는 구결 확정이 늦어 언해도 늦을 수밖에 없었다. 오경(五經)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유교가 국시(國是)임에도 불구하고 유자들이 오경(五經)에 대한 합의할만한 수준의 내용 해석을 공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가의 오경 언해가 퇴율(退栗)시대를 거치면서 출현하고 있는 점은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하지만 세조가 왕위에서 물러난(1470) 뒤 왕위에 오른 성종은 이듬해(1471)에 유자들의 상소에 의해 간경도감을 폐지하였다.

   간경도감이 폐지된 뒤에도 『금강경삼가해언해』와 『증도가남명계송언해』 등의 일부 언해본들은 자성대비(慈聖大妃)와 인수대비(仁粹大妃) 등 왕실의 지원을 받아 내수사(內需司)에서 인간되었다. 이들 언해본들의 인간을 분석해 보면 당시에 수요가 많았던 전적들 중심으로 간행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처음 간행된 『능엄경언해』를 필두로 해서 『법화경언해』와 『원각경언해』 및 『금강경삼가해언해』와 『불설아미타경언해』 그리고 『불정심다라니경언해』와 『몽산법어언해』 등은 조선 전기의 불자들과 일부 유자들 사이에서도 널리 읽혔던 전적들이다. 이 중 『금강경삼가해언해』와 『증도가남명계송』은 간경도감이 폐지되기 전에 이미 다른 불전 언해 사업과 함께 추진되어 완성되어 있었던 것을 자성대비의 후원으로 학조(學祖) 대사가 내수사(內需司)에서 간행한 것이다. 이들 언해본들은 금속활자(乙亥字)로 간행되었으며 내용면에서는 폐지된 간경도감의 후속 사업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또 인수대비의 후원을 받아 간행된 『불정심다라니경언해』와 『오대진언언해』 그리고 『영험약초언해』는 모두 다라니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불전들이다. 이 중에서도 학조 대사가 언해하여 간행한 『육조법보단경언해』와 『진언권공』 및 『삼단시식문』은 목활자(木活字)로 간행되었다는 점과 한자음표기에 있어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지양하고 현실 한자음을 표기한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정부 주관의 교서관과 간경도감에서 불서들을 언해하고 간행하던 전기와 달리 중기 이후에는 왕실의 후원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16세기 이후에는 강화도 정수사 등과 같은 단위 사찰에서 기존의 불전 언해본들을 복각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더욱이 단위 사찰에서는 『미타참절요언해』(彌陀懺節要諺解, 1704)·『염불보권문언해』( 念佛普勸文諺解, 1741)·『지장경언해』(地藏經諺解, 1762) 등과 같은 정토계통의 불전들 일부만을 언해하여 인간하였다.

17세기 이후에는 경교(經敎) 언해본의 간행 사례가 크게 줄어들게 되고 의례(儀禮)집과 의례집 언해본들의 간행이 주조를 이루게 되었다. 왕실 역시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원찰들의 의례집 간행을 주로 후원했다. 당시 의식집들은 일정한 안목 아래 취사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 종래의 것을 그대로 재수록 한 것일 뿐이어서 적지 않은 문제점도 안고 있었다. 백파 긍선(白坡 亘璇, 1767~1852)의 『작법귀감』은 당시 의례집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비판하면서 새롭게 집성한 이 시대의 대표적인 의례집이었다. 이후 불교 의례들은 1930년대에 이르러 안진호(安震湖, 1880~1965)에 의해 『불자필람』(佛子必覽, 1931)과 『석문의범』(釋門儀範, 1935.10)으로 집성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5. 전시 의의

   일찍이 초조본 『고려대장경』에 빠진 장소(章疏)류를 보충하기 위해 『고려교장』을 편찬했던 의천 대사는 대장경의 편찬을 “천 년의 지혜를 정리해 천 년의 미래로 전해주는 일”이라고 했다. 대장경의 조성사업은 한 문명의 집대성 과정이자 국가의 대형 프로젝트였다. 때문에 대장경의 소유 여부는 문명국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었다. 동아시아 각국은 모두 대장경 조성을 위해 국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송나라는 지난 천 여 년 간 인도에서 들여와 번역 인출한 불교 전적들을 집대성하기 위해 처음으로 대장경을 판각하였다. 그 뒤를 이어 요(글안)와 고려 및 티베트와 몽골 그리고 금(여진)과 청(만주)에서도 대장경 판각을 완수하였다.

대장경을 지니지 못했던 일본은 수차례 조선 정부에 사신을 보내 대장경판과 인간본(印刊本)을 요청하면서 에도(江湖)시대에 들어서서 비로소 대장경을 조성할 수 있었다. 일본이 이처럼 집요하게 대장경판과 인간본을 요구했던 것은 그들 역시 문명국의 대열에 들어서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일본은 동아시아의 각 대장경들과 자국 판각의 대장경에 의지해 여러 활자본 대장경을 조성하였고 이를 토대로 불교학 연구의 기반을 든든히 하였다. 또 한자문화권은 아니었지만 태국과 미얀마 등의 동남아 지역에서도 삼장(三藏) 중심의 장경을 집대성하여 자국의 문명 수준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 이후 천 년이 지나 고려본 대장경과 조선 간경도감판 인간본 및 대장경 목록, 고금속 활자본, 언해본, 변상도가 아름다운 이판본 불경과 각국 불경들을 나란히 전시하고 있다.

   금년(2011)은 『고려대장경』 판각(1011) 천 년을 기념하는 해라는 의미를 넘어 다시 새로운 천년을 준비하는 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번 대장경 간행 천년 기념 특별전시는 『고려대장경』 뿐만 아니라 국내 불전의 여러 인간(印刊)본 및 한중일 대장경판과 티베트와 몽골의 금사경 그리고 동남아 패엽경과 만주어 불경 등을 망라하여 전시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특히 이번 전시회는 한역 대장경뿐만 아니라 대표적 한문 불전 150여 종의 전시를 통해 불전 인경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사뭇 크다고 할 수 있다. 불경에서는 “눈먼 거북이가 망망대해를 떠돌다 천 년 만에 통나무를 만나는 것처럼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그 거북이가 다시 천 년 만에 통나무에 뚫린 구멍으로 머리를 넣어 하늘을 한 번 쳐다보는 것만큼 불법(佛法)을 만나기 어렵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났고 오늘 불법의 바다를 만나는 인연을 만났으니 시절 인연을 잘 맞추어 살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오늘 여기에서 지혜의 활로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길은 불전의 바다를 한 자리에서 친견할 수 있는 이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놓치지 않는 ‘안목의 구비’와 ‘열람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