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과 世界의 佛經展
 












































세계의 문화유산 「고려대장경」

여 승 구 (주)화봉문고 사장

고려대장경이란?

   불전(佛典)이란 석가(釋迦)의 가르침을 적은 불교(佛敎)의 경전(經典)이다. 기본적인 경전을 「일절경(一切經)」 또는 「대장경(大藏經)」이라 부르며 정식으로는 「경장(經藏)」ㆍ「율장(律藏)」ㆍ「논장(論藏)」을 합해서 삼장(三藏)이라고 한다. 경장은 교리를 설명한 경전으로 석존의 설교를 모아놓은 아함경(阿含經)과 석존의 가르침을 간접적으로 해설한 것도 포함되어 있다. 율장은 교단의 계율(戒律)을 모아놓은 총서이며 논장은 후세 스님들의 저작물을 모아놓은 총서이다. 기원전 386년 불타입멸(佛陀入滅) 직후 5백인의 제자가 왕사성(王舍城)에서 제1차 결집(結集)으로 경장과 율장의 기초를 확정하고 기원전 276~270년의 제2차 결집(結集)에서 경율(經律) 이장(二藏)의 내용이 정리되었다. 논장은 아소카王 제위 중(기원전 286~232) 제3차 결집(結集)과 가니소카王 제위 중(서기 129~152) 북인도 캐시미르의 제4결집(結集)을 통해서 정리되었다고 전해진다.

    중국의 최초의 불전은 서기 67년 낙양(洛陽)의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으로 알려져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백제의 고승 겸익(謙益)이 서기 520년 해로로 중인도(中印度)의 상가나율사(常伽那律寺)에서 오부율(五部律)의 산스크리트 경전을 가져다 72권의 역서를 내어 백제 율종(律宗)의 시조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은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삼경의소(三經義疏)가 최초의 경전주석이다.

   책 수집가들이 오래되고 희귀한 책을 찾아서 헤매다 보면 최초로 조우하게 되는 것이 불경(佛輕)이요 고려본(高麗本)이다. 서양에서는 구텐베르크가 최초로 42행 성서를 찍이낸 1450~55년부터 1500년 까지의 여명기에 나온 책들을 인큐나브라(Inqunabra)라고 해서 대단한 희귀본으로 취급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의 책이 서양의 인큐나브라와 비슷한 정도로 희귀본 대접을 받고 있으며, 국가에 문화재지정 신청을 내면 국보나 보물로 지정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고려시대의 출판문화는 중국서적의 복각 출판과 대장경을 중심으로 한 불경출판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불교(佛敎)는 태조(太祖) 이후 국교(國敎)로써 文化ㆍ思想ㆍ社會(문화ㆍ사상ㆍ사회) 전반에 걸쳐서 큰 영향을 미쳤으며 불경 출판이 왕성하였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라려예문지(羅麗藝文誌, 李聖儀ㆍ金約瑟 공저)에 의하면 전체 전적(典籍) 7백35종 중 2백35종이 불경(佛經)으로 조사되어 있다. 고려시대 불경출판의 최고봉인 초조대장경과 재조대장경의 출판은 평화시대의 정상적인 종교ㆍ문화 활동이 아니라 거란과 몽고의 외적이 국토를 유린하는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은 위기상황에서 국난타개와 구국의 일념으로 발원 착수한 국가적인 행사였다. 재조대장경(현재 해인사에 보관중인 팔만대장경)은 강화도로 쫓겨간 고려정부가 대장경을 출판함으로써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몽고군을 ?i아내고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시작한 국가대사이다. 재조대장경은 고려시대 출판물의 으뜸이며 동양삼국에서도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대장경이다.


고려대장경은 세계 최고의 판본

   사가(史家)들은 고려를 문화 수준을 높았으나 국방은 나약한 나라로 기술한다.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은 현종2년(1011)에 거란이 개경까지 침입해와 긴박한 상태에서 이를 불력(佛力)으로 물리치고 문화의 힘을 과시함으로써 다시 넘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주조(雕造)를 시작하여 선종4년(1087)년에 완성하였다. 총 5백70함(函) 6천여권으로 북송(北宋)의 개보판ㆍ거란판ㆍ송조신역경론(開寶板ㆍ契丹板ㆍ宋朝新譯經論) 등을 수용하였으나 외국것을 번각하지 않고 우리손으로 다시 써서 만들어 조판술(雕板術)의 우수성을 과시한 동양 초유의 한역장경(漢譯藏經)이다.

   초조대장경 다음으로 조성한 대장경이 의천(義天, 1055~1101)의 속장경(續藏經)이다. 의천은 문종의 넷째 아들로 어려서 불교에 입문하여 13세때 승통(僧統)이 되었다. 1085년에 중국에 몰래 입국하여 불법을 닦고 1086년 귀국할 때 많은 불서(佛書)를 가지고 돌아와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속장경 1천10부 4천8백57권을 간행하였다(1091~1102). 초조와 재조대장경이 14字씩 배열되었다면, 속장경은 20~22자씩 배열되어 그 차이를 첫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중국으로부터 가져온 기간본을 참작하지 않고 당대의 명필가를 동원하여 새로 정서하고 정각한 고려의 독자적인 판본으로써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고려는 국초부터 거란ㆍ여진ㆍ몽고 등의 많은 외침을 당하였다. 고종18년(1231)에 몽고군이 침입하여 송경(松京)에 육박해오자 그 다음해 강화도로 임시수도를 삼고 몽고군에 대항하였다. 이때 부인사(符仁寺)에 간직되었던 초조대장경판이 소실되었다.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은 고종23년부터 38년1236~1251)에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고, 총 6백64함(函) 1천5백62부 6천7백83권 경판총수 8만1천판(板)으로 재조대장경을 8만대장경이라고 하는 것도 이를 근거한 것이다. 이 경판은 강화도성 서문 밖 대장경판당(大藏經板堂)에 소장되어 오다가 선원사(禪源寺)로 옮겼고, 그 후 조선조 초기에 해인사(海印寺)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본에서도 명치 대정년간(明治 大正年間)에 이것을 정본으로 하여 축쇄대장경(縮刷大藏經)과 만자대장경(卍字大藏經)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을 간행하였고, 중국에서는 고려대장경을 정본으로 삼은 축쇄대장경(縮刷大藏經)을 역수입하여 빈가정사판(頻伽精舍板)을 간행하였다. 중국의 손종첨(孫從添)은 「장서기요(藏書紀要)」에서 「외국에서 인쇄된 한적(漢籍)으로는 고려본(高麗本)이 최고다. 오경(五經)ㆍ사서(四書)ㆍ의약(醫藥)관계 등 중국에서 인쇄된 책은 자구(字句)가 탈락되고 장수(章數)가 불완전(不完全)한 것이 있으나 고려본(高麗本)은 완전한 선본(善本)으로 나오고 있다.」고 극찬하고 있다. 우리 출판인쇄문화의 원류는 무약문강(武弱文强)하였던 고려시대의 책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고, 대장경이 바로 고려출판문화의 꽃봉오리라 할 수 있다.


세계 최고의 전적 문화유산 고려대장경

   대장경의 서체(書體)에 대해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는 「非肉身之筆이요 及仙人之筆」이라고 극찬하였다고 한다. 비단 출판인쇄 뿐만 아니라 한국문화 전반에 대해서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중국이나 북방으로부터 영향받은 남의 문화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우리 색깔을 가진 독특한 개성있는 문화로 발전시켜 왔다는데서 그 의미와 진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책을 그대로 해적판을 내지 않고 원본보다 더 훌륭하게 탈자를 줄이고 장수를 완전하게 보완하고 새로이 글씨를 써서 오히려 중국인으로부터 찬사를 받은 사실에 고려시대의 출판인쇄문화의 우수성을 발견할 수 있다. 대장경을 출판하기 위해서는 거제도 백화목(白樺木)을 3년간 바닷물에 넣었다가 다시 소금물에 절여서 그늘에 말린 다음 돌보다 굳은 나무에 도장 파듯이 일점일획 잘못 쓰거나 탈자가 없이 한자 한자 각을 하자면 하루 10자 이상을 파기가 어렵다고 한다. 팔만일천이백오십팔板의 해인사 대장경을 16년 동안에 완성하자면 각수(刻手) 만천명이 넘어야 하며, 글자를 쓰고 자재를 준비하고 교정ㆍ편집ㆍ인쇄를 하는 인원까지 수천명이 동원되어야 하는, 전 국력을 쏟아부어야하는 큰 사업이다.

   이런 불사(佛事)를 통해서 외적을 격퇴할 수 있고 대장경의 조판으로 외침을 막았다는 고려시대의 종교적인 사유는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신비성으로 돌릴 수 밖에 없다.

   세계에 자랑할만한 문화유적들이 내외의 병란을 피하여 어떻게 1천년을 견디고 오늘에 이르렀을까? 고려시대의 출판은 간행 주체별로 볼 때 관판(官板)ㆍ사찰판(寺刹板)ㆍ사가판(私家板)으로 대별할 수 있다. 사찰판(寺刹板)은 중기 이후부터 왕가나 사가에서 명복을 비리기 위하여 사찰에서 시주하는 자금으로 많은 불서가 간행되었다. 사찰에는 각자(刻字)나 제본(製本)ㆍ제지(製紙) 기술이 능한 승려공인이 많이 있어서 고려인쇄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사가판(私家版)은 주로 말기에 문사들의 시문집(詩文集)이 주로 간행되었다.
공예품 유물들이 거대한 지하의 흙무덤이 안전지대였다면, 옛책들이 오늘의 문화유산으로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은 절간 속에서 침묵과 미소로 천년을 살아온 부처의 신통력으로 견뎌온 복장본에 그공을 돌려야 할것이다.

   그러나 앞으로도 천년을 더 견딜 수 있을것이라는 전통조선지의 우수함이 없었다면 부처님의 신통력이 오늘날과 같이 그 위력을 다 발휘할 수 있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글은 光州日報 1993.8.10 ㆍ17ㆍ24 일 3회에 걸처 연재한
「呂丞九의 책 이야기 」를 옮겨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