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자 김정호 선생의 눈물
 










































古山子의 大東輿地圖

여  승  구 / (주)화봉문고 사장       

고산자 김정호 선생에 대하여

  고산자 김정호 선생·古山子 金正浩 先生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는 나의 애장본·愛藏本 중의 하나이다. 22첩·帖으로 된 이 지도·地圖는 너무 방대하여 사무실에는 걸어 놓을 수가 없어서 금고에 넣어두고 가끔 펴보는 정도이지만, 역시 고산자·古山子에 의하여 제작된 1장짜리 전도·全圖를 벽에 걸어 놓고 들여다보노라면 가난과 불우 속에서 오직 한길을 걸어온 위대한 한 애국자·선각자의 일생이 생각되어 숙연한 기분에 빠진다.

  내가 고지도·古地圖에 관심을 갖고 이를 수집하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84년 5월 오사까 여행·旅行 중 한 교포가 경영하는 고서점·古書店에서 1894년(明治27년) 이곳에서 발간된 조선여지도·朝鮮輿地圖를 입수한 뒤부터이다. 이 지도에는 개화기·開化期 선각자인 박영효·朴泳孝의 제자·題字와 추천사가 있고, 전년에 김옥균·金玉均이 한국을 떠날 때 가지고 온 한국에서 둘도 없는 세밀한 지도로서, 늘 몸에 지니고 있었는데 지난번 상해·上海로 떠날 때 어떤 유족·遺族에게 맡겨둔 것을 축소해서 간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울릉도를 죽도·竹島, 독도·獨島를 송도·松島, 두만강·豆滿江 하구의 녹둔도·鹿屯島를 녹도·鹿島라 표기하여 우리나라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이 조선여지도·朝鮮輿地圖를 구입하는 것이 계기가 되어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등 고지도·古地圖 500여 종을 수집하기에 이르렀다.

  김정호 선생의 본관·本貫은 청도·淸道이고 자·字는 백원·伯元이며 황해도·黃海道에서 출생·出生하였다 하나 이 모든게 확실하지는 않다. 서울로 올라와서는 남대문 밖 만리재에서 살았다고도 하고, 서대문 밖 공덕재에서 살았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불과 150 여 년 전 사람으로 역사에 빛나는 위대한 업적을 남겨 놓은 선생의 일생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은 기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유겸산·劉兼山의 이향견문·里鄕見聞에 다음과 같은 선생에 대한 부정확·不正確한 간단한 기록이 있다. 「김정호·金正浩는 고산자·古山子라 자호·自號하였는데 본래 기교한 재예·才藝가 있고 특히 여지도·輿地圖에 열중하여 널리 상고하고 또 널리 자료를 수집하여 일찍이 지구도를 만들고 또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제작하여 손수 판각하여 세상에 인포·印布하였다. 그 상세하고 정밀함이 고금에 견 줄 데가 없다. 나도 그 중 하나를 얻고 보니 참으로 보배가 되겠다. 그는 또 대동여지고 대동지지·大東輿地攷 大東地志 10卷을 편집하였는데 미처 탈고하지 못하고 죽으니 매우 애석한 일이다.」

  선생은 1834년 청구도·靑丘圖를 저작·著作하였고 1861년에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全二十二帖를 저작간행·著作刊行하였으며, 1864년에는 대동지지·大東地志(全十五冊)의 간행·刊行,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재간행·再刊行하여 대원군·大院君에게 바쳤다. 그는 정밀한 우리나라 지도를 그리기 위하여 일생을 바쳤고 그것을 완성하여 정부에 바친 후 국가기밀을 누설하였다는 죄목으로 옥에 갇혀 죽었으니 참으로 억울하고 분통이 터질 노릇이다.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교과서·敎科書에는 김정호 선생에 대한 글이 있는데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00여 년 전 황해도·黃海道 어느 두메산골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뜰에 황혼을 띄고 섰는 한 소년이 있었다. 「대체 저 山줄기가 어듸서 일어나서 어듸로 가서 그쳤는지, 그림 그린 것이라도 잇섯스면 앉어서 알 도리도 잇스렷마는 우리들 배우는 책에는 도모지 그런 것이 업스니 엇저면 조은가.」 이 소년·少年의 성·姓은 김·金이요 이름은 정호·正浩다. 서당·書堂의 선생님께 산·山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물어봤으나 그런 것을 알아서 무엇 하느냐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일 뿐이었다. 그 후 친구로부터 색도·色圖 한 장을 얻어 동네마다 돌아다니며 일일이 맞추어 보았으나 틀리고 빠진 것이 많고 부합되는 것은 극히 드물었다. 너무도 실망한 그는 그 후 서울의 규장각·奎章閣에 있는 팔도지도·八道地圖를 한 벌 얻어 황해도·黃海道로 가서 실지·實地로 조사한 결과 그 소루·疏漏함이 먼저 번 색도·色圖와 다름이 없다. 「이거 원 지도·地圖가 있다하나 이같이 틀림이 많아서야 害만 되지 利로움은 없을 것이다.」 지도를 만드는 일은 교통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금력·金力과 인력·人力이 많이 필요·必要한 일인데 혼자 힘으로 교통이 불편한 그 당시에 이것을 감행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춘풍추우·春風秋雨 십여성상·十餘星霜 천신만고·千辛萬苦의 긴 여행 끝에 팔도·八道를 세 번 돌았고 백두산·白頭山에 오른 것이 여덟 차례라 한다. 마침내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의 원고·原稿는 완성·完成하였으나 이것을 인쇄하려면 판·版을 만들어야 하는데 가난한 살림에 돈이 있을 리 없다. 즉시 서울 서대문 밖에 집을 잡고 소설·小說을 지어 얻은 돈으로 생계를 삼아 가는 한편 하나둘씩 판목을 사모아서 틈틈이 그의 딸과 함께 지도판·地圖版을 새겼다.

  10여 년이 걸려서 완성되었으므로 비로소 인쇄하여 몇 벌을 친한 친구에게 주고 일부는 자기가 간수하였다. 그런지 얼마 안돼서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나 자기가 간수한 지도 한 벌을 아는 대장·大將을 통해서 대원군·大院君께 바쳤다. 그러나 「함부로 이런 것을 만들어서 나라의 비밀·秘密이 다른 나라에 누설되면 큰 일이 아니냐」고 상 대신 벌을 내렸다. 이 일로 지도판을 압수하고 정호 부녀·正浩 父女를 옥에 가두었다. 부녀는 얼마 아니 가서 옥중·獄中 고생을 견디지 못하였는지 통탄·痛歎을 품은 채 사라지고 말았다. 아! 비통·悲痛한지고 때를 만나지 못한 정호·正浩…… 그 신고·辛苦와 공로·功勞의 큼에 반하여 생전의 보수가 그 같이도 참혹한 것인가? 이 지도는 러일전쟁 때 일본군·露日戰爭時 日本軍의 승리·勝利에 크게 공헌·貢獻하였고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에 무이·無二의 호자료·好資料로 활용·活用되었다. 아! 정호·正浩의 간고·艱苦는 비로소 이에 혁혁·赫赫한 빛을 나타내었다 하리로다.”

대동여지도의 역사적 의미

  1861년에 나온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는 현대적·現代的인 실측지도·實測地圖가 나오기 이전에 가장 정밀하고 과학적이며 실용적으로 제작된 한국 최고·最高의 지도였다. 물론 이 지도 이전에 농포자 정상기·農圃子 鄭尙驥(1678~1752)에 의하여 「동국지도·東國地圖」가 제작되었고 김정호·金正浩에 의하여 1831년에 「청구도·靑丘圖」가 제작·간행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 안으로는 자아반성과 비판이 강력히 일어났고 밖으로는 청조·淸朝의 실학풍·實學風과 함께 들어온 서양·西洋의 과학사상·科學思想에 영향을 받아 지식층에서는 진실하고 다채로운 새 자아·自我를 구축하려는 기운이 계속되고 있었다.

  식자 사이에는 경세치민·經世治民에 관한 여러 가지 개선책이 강구되고 경제를 비롯하여 경학·經學, 역사·歷史, 지리·地理, 지도·地圖, 수리·數理, 역상·曆象, 어문·語文, 금석학·金石學 등에 이르기까지 새롭고 실증적인 연구의 기풍이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지도에 있어서는 과학적·科學的인 혁신의 바람이 두 차례 일어났는데, 그 첫 번째가 정상기·鄭尙驥의 「동국지도·東國地圖」요, 그 두 번째가 김정호·金正浩의 「청구도·靑丘圖」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이다. 「동국지도·東國地圖」의 제작·製作은 무엇보다도 지도의 실용적 가치를 높이고자함에 있었으며 여기에 다시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연구를 더하여 「청구도·靑丘圖」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가 간행된 것이다.

  이 지도의 기본 제작방식·基本 製作方式은 십리축척·十里縮尺의 능침방한·方限, 일종의 경위선표·經緯線表을 이용하여 전국·全國의 산천·山川, 해도·海島, 도리·道里, 영위·營衛, 읍치·邑治, 성지·城池, 진보·鎭堡, 역참·驛站, 창고·倉庫, 봉수·烽燧, 방리·坊理, 고적·古跡 등을 나타내고 있는데 방한·方限의 내부·內部는 물론 그 주위도 전혀 도면에는 나타내지 않고 오직 그것은 정간·井間, 밑받침으로 이용하여 제1첩도·帖圖 첫머리에 견본으로 붙이고 있다. 그 방한·方限의 방십리·方十里, 사경十四里로 한 폭의 횡방·橫方이 八·八十里 종방·縱方이 十二·百二十里였다. 그리고 그 도면에는 단지 도로선표에 십리·十里 간격으로 점을 찍어 도로 자체의 이정·里程은 물론 그 주위와의 거리도 짐작하게 하는 축척·縮尺의 대용·代用이었다. 이 지도는 모두 二十二층으로 분리되고 첩·帖은 연폭·連幅을 접어 책자와 같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二十二첩을 각각 펴서 순서대로 연접시키면 그대로 전국의 총도·總圖가 되도록 고안하였으니 간편하고 실용적이며 과학적인 현대 지도에 접근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이 지도는 각지와 연결된 도로망과 아울러 꾸불꾸불한 산천·山川의 본지형태·本支形態에 주력한 점이 특이하다. 도면에 나타난 도로망은 그물을 친 것과 같이 종횡으로 되어 있고 주위에 토리·土里 간격으로 이점·里點을 더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멀고 가까운 거리를 역력히 알게 하였고 산천·山川의 본지·本支와 그것의 종횡우회 특히 산악의 독치·獨峙, 병치·並峙, 연치·連峙, 첩치·疊峙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게 유의하여 일목요연한 입체적 도면을 나타내고 있다.

  「동국지도·東國地圖」에 뒤이어 1831년에 제작된 고산자·古山子의 「청구도·靑丘圖」는 한국지도 제작을 진일보·進一步시킨 이차 혁신·二次 革新이라 할 수 있다. 「청구도·靑丘圖」에는 범례·凡例 다음에 지도식·地圖式이라 하여 지도제작법에 관하여 말한 것이 있는데 기하학의 동심도적·同心圖的 방법의 준례를 든 것이라든가 중국역 기하원본·中國譯 幾何原本에 의거하여 방한·方限에 의한 지도의 확대 및 축소법을 예시한 것 등을 보면 고산자·古山子가 당시 중국을 통해 들어온 근대 서양·近代 西洋의 과학지식·科學知識의 영향을 얼마나 많이 받았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책상·冊床 위에서 백리축척·百里縮尺을 사용하여 제작된 「대동지도·大東地圖」에 뒤이어 십리축척·十里縮尺을 사용한 「청구도·靑丘圖」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의 출현·出現은 실측·實測에 의거한 현대적인 지도가 나오기 이전에 어떻게 하면 실측·實測에 가까운 실용적·實用的이고 정밀한 지도를 만들어 사용할 수 있을까 하는 선인·先人들의 열의와 고심이 열매 맺은 획기적인 발전·發展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말년의 대작인 「대동지지·大東地志, 全三十二卷·十五冊」는 「청구도·靑丘圖」의 지도적 면·地圖的 面을 다시 정리하여 조금 더 발전시킨 것이라면, 대동지지·大東地志는 「청구도·靑丘圖」의 지지적·地誌的인 면·面을 확대하고 보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산자·古山子는 이 대작·大作을 계획한 의도에 대해서 제일첩·第一帖의 지도총설·地圖總說에서 중국·中國의 「방여기요·方輿紀要」를 인용·引用하여 지리·地理의 험역·險易이 군사행동·軍事行動에 얼마나 절실한 영향을 끼치며 위정자는 내치·內治·국방·國防에 있어서 재부·財賦의 소출 경전·所出 耕田·수리·水利의 유무·有無 나아가서는 민정풍속·民情風俗의 어떠함을 알지 못하고는 안 된다는 것과 세상이 어지러운 때에는 그러한 지리 민정에 관한 지식에 의하여 강포·强暴를 없앨 수 있고 시대·時代가 승평·昇平할 때에도 그것에 의하여 나라를 경리하고 백성을 다스릴 수 있다는 자기 소신을 주장하고 있다.

150주년을 맞아 고산자 선생을 다시 생각한다

  그는 단순한 지도제작자·地圖製作者가 아니라 박식·博識하고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는 지리학자·地理學者, 애국자·愛國者이며, 선각자·先覺者이고 등산가·登山家이며 나라의 통치자에게 충고를 아끼지 않았던 우국지사였다고 생각된다. 일생을 걸려서 가난과 박대 속에서 이룩한 위대한 업적을 상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감옥에 가두어 죽이는 이 나라의 통치자에 비해서 日帝는 이를 이용하여 청일·淸日, 러일전쟁·露日戰爭을 승리·勝利로 이끌고 식민지·植民地 수탈을 위한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의 좋은 자료로 썼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 현재에도 우리가 이런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볼일이다.

  요즈음 학계의 일부에서는 지도 제작의 어려움을 생각할 때, 고산자 개인으로 이런 거대한 작업을 하기에는 불가능하고 오히려 유력자나 정부의 지원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는 것 같다. 더구나 전부 파기되었을 것이라는 판목의 일부가 국립박물관 서고에 일부 남아 있다는 것을 그 증거로 제시하고 있으나, 모두 태워버렸다고 기록된 역사적인 기록과는 달리 그 흔적이 조금씩 남아 있는 사실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김정호 선생에 대해서 출생의 기록이 전무한 것은 그가 중인 출신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으나 대동여지도 제작을 한 이후부터 사후에 이르기까지 기록이 전무한 것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지도를 제작하였다는 주장의 근거를 믿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최한기나 신헌 등 조정에 나가 일하는 친구들의 사적인 도움을 정부의 지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 큰 확대 해석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20 여 년간 만리재에서 소설을 팔아 자금을 만들어 독자 제작하였는데 군사기밀을 유출한 죄로 감옥살이 후 죽었기 때문에 그 기록들이 전부 회수·파기 처분되었다는 설이 훨씬 설득적이다.

  김정호 선생이 돌아가시고 150 여 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료도 발굴되지 않고, 연구노력도 확실하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은 역사에 우뚝 솟은 위대한 한 인간을 오히려 풍수쟁이나 인각·印刻쟁이 정도로 폄하하려는 사회의 잘못된 풍토에서 기인되지 않았나 생각되며, 하루빨리 활발한 자료수집을 통해서 깊은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충심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