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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판(濟州板) 『삼국지연지』 간년(刊年) 고증

박철상/포럼ㆍ그림과 책 공동대표

1. 서론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고려 말기의 일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간행 기록이 있는 것은 제주판 『삼국지연의』(온전한 명칭은 『신간고본대자음석삼국지전통속연의(新刊古本大字音釋三國志傳通俗演義)』이지만 여기서는 『삼국지연의』라 약칭함)가 유일하다. 그러나 정확한 간행 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었다. 그것은 제주판 『삼국지연의』 간기의 모호성 때문이었다. 제주판 『삼국지연의』의 간기에는 “歲在丁卯耽羅開刊”라고만 되어 있어 ‘정묘’가 과연 몇 년도인지를 놓고 논란을 일었던 것이다. 특히 『조선왕조실록』 <선조 2년(1569) 6월 20일자>에 등장하는 기대승(奇大升)의 발언을 통해 『삼국지연의』의 간행 사실이 확인되면서 ‘정묘’년이 1567년인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병자자본(丙子字本) 『삼국지연의』가 발견되면서 조선 최초의 간본(刊本)은  병자자본 『삼국지연의』인 것으로 귀결되었다.1) 그렇다면 제주판 『삼국지연의』는 언제 간행된 것일까?

   필자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은 박재연 교수가 소장하고 있는 제주판 『삼국지연의』를 보면서부터이다. 박재연 교수 소장의 『삼국지연의』를 열람한 필자는 현전하는 제주판 『삼국지연의』의 간년을 16세기로 보기는 어렵고, 일부는 18세기에 간행된 판본이라는 의견을 박교수에게 전달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간기가 있는 『삼국지연의』를 실견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일찍이 통문관 주인이었던 고(故) 이겸로씨가 소장하고 있던 『삼국지연의』 마지막권에 간기가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로서는 그 소재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비교할 방법이 없었다. 달리 소장처를 확인할 수도 없었다. 더구나 현전하는 제주판 『삼국지연의』는 대부분 상태가 좋지 않아 원래 표지가 남아 있는 경우도 아주 드물었다. 따라서 연대를 확정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다가 필자는 최근 간기가 있는 제주판 『삼국지연의』의 마지막권을 입수했는데, 간기는 물론 표지까지 온전한 선본(善本)이었다.(사진1) 일단 비교의 기준이 되는 판본이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이 판본을 기준으로 다른 판본들과의 비교를 통해 제주판 『삼국지연의』의 간기를 고증해 보려는 것이다. 기존의 학설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의 검토와 동시에 간기가 있는 『삼국지연의』의 분석을 통해 제주판 『삼국지연의』의 간기를 확정하고자 한다. 제주판 『삼국지연의』의 간기를 확정하는 일은 조선시대 『삼국지연의』의 수용과 그 영향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2. 제주판 『삼국지연의』의 검토


(1) 전본(傳本) 현황

   제주판 『삼국지연의』는 모두 12권 12책으로 이루어진 목판본인데, 중국 명나라 주왈교(周曰校)가 간행한 목판본을 번각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周曰校本 甲本’을 저본으로 사용하였다.2) 각 책의 권수에 ‘明書林周曰校梓行’이라 새겨져 있어 이를 증명하고 있다. 특히 판식은 13행 24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조선에서 간행된 목판본에 잘 보이지 않는 형태이다. 현전하는 제주판 『삼국지연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3)

권 차

소   장   처

비  고

권 1

鮮文大 중한번역문헌연구소

 

권 2

鮮文大 중한번역문헌연구소, 규장각 想白文庫, 청주박물관

 

권 3

鮮文大 중한번역문헌연구소, 규장각 想白文庫, 啓明大 圖書館, 청주박물관

 

권 4

鮮文大 중한번역문헌연구소, 규장각, 林熒澤 교수, 청주박물관

 

권 5

규장각, 동국대 도서관(황의돈 구장본)

 

권 6

鮮文大 중한번역문헌연구소, 규장각, 영남대 도서관 南齋文庫, 청주박물관

 

권 7

鮮文大 중한번역문헌연구소, 규장각, 청주박물관

 

권 8

鮮文大 중한번역문헌연구소, 규장각, 청주박물관

 

권 9

鮮文大 중한번역문헌연구소, 규장각, 청주박물관

 

권10

鮮文大 중한번역문헌연구소, 규장각, 청주박물관, 修綆室

 

권11

鮮文大 중한번역문헌연구소, 영남대 도서관 南齋文庫, 청주박물관

 

권12

鮮文大 중한번역문헌연구소, 雅何室

간기 無

山氣文庫(이겸로 구장본), 국립중앙박물관, 청주박물관, 修綆室

간기 有


표에 보이는 것처럼 12권이 모두 남아 있기는 하지만, 한 곳에 소장되어 있지 않고 공사(公私)의 서가에 산재되어 있다. 더구나 현전하는 판본 상당수의 상태가 좋지 않다. 낙장도 많고 보사된 곳도 더러 있다. 문제는 권12의 경우 간기가 있는 판본과 없는 판본이 각각 존재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간기가 없는 판본의 경우에도 판본에 따라 상이한 점이 발견된다. 과연 이들은 동일한 판본일까? 전혀 다른 판본일까?


(2) 판본 검토

   제주판 『삼국지연의』가 중요한 것은 간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서 살펴보았듯이 간기가 있는 판본과 없는 판본이 현전하고 있다. 두 개의 판본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4) 따라서 이 두 판본의 선후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 위해 간기가 있는 권12의 세 판본을 비교해 보도록 하겠다. 간기가 있는 판본 중에서는 수경실본(修綆室本), 간기가 없는 판본 중에는 김영진 교수 소장의 아하실본(雅何室本) 및 선문대 중한번역문헌연구소 소장본을 대상으로 하여 글자의 차이, 각수(刻手)의 유무, 기타 판각상의 차이를 비교해 보도록 하겠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구  분

修綆室本(A)

雅何室本(B)

중한번역문헌연구소본(C)

간기

표지

원장(龜甲紋)

최근 개장

없음

판식

花紋魚尾, 黑魚尾 혼재

花紋魚尾, 黑魚尾 혼재

花紋魚尾, 黑魚尾 혼재

11a-1-16

11b-8〜13-1

공백

墨等

墨等

29b-12-18

39a-1-2

40a-7-9

42a-4-12

44a-8-3

46b-6-23

(忄+車)

(忄+車)

52b-3-1

52b-7〜13-1

공백

墨等

墨等

73a-4-24

77b-11행

歲在丁卯耽羅開刊

 

 

77b-12행

三國志傳通

三國志傳通

刻手

77

10, 19, 30, 33(朴元一), 40, 41, 48, 50, 57,

62(金申), 69

33(朴元一)

기타

墨等 없음

판심, 본문 중에 墨等 있음

판심, 본문 중에 墨等 있음

다음과 같다.(사진2)



세 판본을 비교해 보면 몇 가지 측면에서 차이가 발견된다. 즉, 간기가 있느냐의 문제는 차치하고, 글자상의 차이와 묵등(墨等)의 유무, 각수의 유무에 차이가 있다. 이러한 점을 기준으로 위 표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B)와 (C)는 동일하지만 (A)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각 판본상의 글자를 비교해 봐도 확실히 구분된다. 다만, (B)와 (C)는 판식을 비롯한 각자(刻字)의 특징까지도 거의 일치하고 있지만, (B)에 보이는 각수가 (C)에서는 사라지고 없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위의 세 판본은 각기 다른 판본일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먼저 (B)와 (C)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두 판본의 판식(版式)은 완전히 동일하지만 (B)는 인쇄상태가 아주 선명하고 문드러진 글자가 전혀 없다. 판각이 이루어진 직후에 인출된 판본임을 알 수 있다. 반면에 (C)는 인쇄상태도 거칠고 책판의 상태가 아주 불량하여 거의 읽을 수 없는 면도 상당수에 이른다. 그렇다고 보각(補刻)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또,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B)에 보이던 각수의 이름이 (C)에서는 대부분 사라졌다. 단순히 뭉개진 것이 아니라 일부터 도려낸 흔적이 있다. 이를 종합해보면 (B)와 (C)는 동일한 판본이지만, (B)가 (C)보다는 훨씬 빠른 시기에 인쇄되었고 (B)에 새겨져 있던 각수의 이름을 도려낸 상태에서 (C)를 인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A)와 (B)는 어떤 관계일까? 선후관계를 따져봐야 한다. 중요한 것은 (A)와 (B)의 판식은 물론 자형(字形)까지도 아주 유사하다는 점이다. 이는 둘 중의 하나는 복각본(覆刻本)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게 원본이고, 어떤 게 복각본일가? 먼저 두 판본에 보이는 글자를 비교해보면, 위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여러 군데서 차이가 발견된다. 그런데 (B)의 글자들은 (A)의 글자를 잘못 판독한데서 비롯된 오각(誤刻)이라는 사실이 확인된다. 즉, (B)가 (A)를 복각(覆刻)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한 것이다. 이는 책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현상이다. (A)는 중국의 주왈교(周曰校)본을 복각했기 때문에 필서체의 느낌이 남아 있고 글자가 행의 중심에 새겨져 있다. 반면에 이를 다시 복각한 (B)는 글자에 생동감이 없고 획이 두꺼워 졌으며, 자획이 계선에 붙어있는 글자가 많다. 쉽게 판독하기 어려운 글자들도 종종 있다. 복각을 거치면서 글자의 판독이 어렵게 된 것이다. 이를 종합해보면 간기가 있는 수경실본이 제주도에서 간행한 최초의 판본이며, 아하실본은 이를 복각한 판본이다. 그리고 중한번역문헌연구소 소장본은 아하실본과 동일한 판본이지만 각수의 이름을 삭제한 후 인출한 책이다.5) 따라서 제주판은 두 개의 판본이 존재한다고 확정할 수 있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 편의상 간기가 있는 제주판 『삼국지연의』를 ‘제주갑본(濟州甲本)’이라 하고, 간기가 없는 판본을 ‘제주을본(濟州乙本)’이라 구분하여 부르기로 한다. 물론 을본(乙本)이 제주에서 간행된 판본이라는 확증은 없지만, 갑본(甲本)을 저본으로 판각한 복각본이라는 점에서 을본(乙本)이라 부르기로 하겠다.6)


3. 제주판 『삼국지연의』 간년(刊年)의 기존 학설에 대한 반론


   제주판 『삼국지연의』의 판본이 두 가지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제주판 『삼국지연의』 갑본(甲本)은 언제 간행되었을까? 간기 “歲在丁卯耽羅開刊”에 보이는 ‘정묘’는 언제일까? 가장 빠른 시기는 임란 이전인 1567년설이다.7) 이 학설은 『조선왕조실록』<선조 2년(1569년) 6월>의 기록을 근거로 한 것이다. 『삼국지연의』에 관한 조선시대의 가장 빠른 기록이기 때문에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문정전 석강에서 임금에게 『근사록』 제 2권을 강하게 되었다. 기대승이 상계하여 아뢰었다. “전에 장필무를 인견하실 때 전교에 장비의 대갈일성에 천군만마가 달아났다 하셨사오나, 정사에는 나오지 않고 『삼국지연의』에 나온다고 들었습니다. 그 책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신도 보지 못했사오나 친구들의 말을 듣건대 심히 황당무계하다 하옵니다. 천문지리 책 같으면 혹은 이전에는 숨겨졌다가는 나중에는 나타나는 수가 있지만, 역사기록에서는 처음에 해당 전기를 잃으면 그 후에 억측하여 부연하고 보충하는 것은 극히 황당하고 괴이한 일입니다. 신이 후에 그 책을 훑어보니 영낙없는 무뢰배의 잡언이옵니다. 고담 같은 것은 잡박하여 무익할 뿐만 아니라 의리를 해치옵니다. 하온대 상감께서 이따금 보시니 심히 걱정되옵니다. 그 속에 적힌 이야기 중에 동승이 의대 속에 조서를 내린다든가, 적벽대전에서 승리하는 것 등은 모두 꾸며낸 허황된 이야기이옵니다. 임금께서 그 책의 근본을 모르실가 봐서 감히 장계를 올리는 것입니다. 이 책뿐만 아니라 『초한연의』 같은 것 등은 이치를 심하게 해치지 아니하는 것이 없습니다. 시문이나 사화는 상관없다지만 『전등신화』나 『태평광기』 등은 사람의 심지를 오도하기에 족합니다. 상께서 그 그릇됨을 아시고 계도하신즉 학문의 공에 충실할 수 있사옵니다.”

또 다시 장계를 올려 아뢰었다. “정사에는 치란과 존망이 다 기록되어 있으니 꼭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문자만 보고 그 사적을 보지 않으면 해가 됩니다. 경서는 심오하되 난해하고 사기는 사적이 불분명하므로 사람들이 경서를 싫어하고 사를 좋아하니 세상이 다 그러하옵니다. 그러므로 예부터 자고로 잡하고 박하기는 쉬우나 정미하기는 어렵다 했습니다. 『전등신화』는 외설되기 이루 말할 수 없사온데 교서관에서 사사로이 물자를 내주어 판각하기에 이르니 양식있는 사람치고 통탄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판본을 없애려고 하되 이제까지 내려와 여염에서 서로 다투어 찍어 내다 보니 그 남녀간의 교합과 신괴하고 허황된 이야기가 많습니다. 『삼국지연의』 또한 허황되기가 이와 같은데 출판되기까지 했으니 그때 사람들이 무식한 소치가 아니겠습니까. 그 문자를 보건대 흔한 이야기로 괴이하기 짝이 없습니다.8)


이 기록이 중요한 것은 『삼국지연의』의 인출 사실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1569년 이전에 『삼국지연의』가 확실히 인출되었다는 것을 방증하는 자료이다. 하지만 인출에 관한 더 이상의 정보가 없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제주판 『삼국지연의』가 1567년 이전에 간행되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전하는 제주판 『삼국지연의』를 보면 지질이나 장황 등을 볼 때 도저히 임란 이전의 판본으로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최근 병자자(丙子字)본이 발견되면서 기대승이 언급한 『삼국지연의』는 활자본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1567년설은 설득력을 잃었다고 볼 수 있다. 

   또 유탁일 교수를 비롯한 일부 학자들은 1627년설을 주장했다.9) 하지만 이 학설 역시 설득력이 떨어진다.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출판상황을 무시한 주장이라는 점 때문이다. 17세기 초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붕괴된 조선의 출판시스템을 복구하는 시기였다. 과거시험을 볼 서책마저 구하기 어려운 출판공황의 시기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주로 교재나 경사(經史)를 출판하기에도 여력이 없었다. 이후 효종(孝宗)대에 들어와서야 출판시스템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는다. 1627년은 혼란한 시기여서 한가하게 12책이나 되는 거질의 『삼국지연의』를 목판으로 간행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주판 『삼국지연의』는 언제 간행된 것일까?


4. 제주판 『삼국지연의』의 간년(刊年)  


   앞서 살펴보았듯이 『삼국지연의』 ‘제주갑본(濟州甲本)’ 간기상의 ‘정묘(丁卯)’는 1567년이나 1627년으로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정묘(丁卯)’는 과연 몇 년도일까? 책판의 기록, 제주갑본(濟州甲本) 분석, 강재열(姜再烈) 수택본(手澤本) 분석 등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삼국지연의』 책판(冊版) 기록

   『삼국지연의』란 이름으로 제주도에 책판이 있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특히 이원진(李元鎭)이 1653에 편찬한 현전 제주도 최고 읍지인 『탐라지(耽羅志)』에도 기록이 없다. 다만, 18세기 후반에 만들어진『고책판유처고(古冊板有處攷)』, 1793년경에 편찬된 『제주대정정의읍지(濟州大靜旌義邑誌)』, 서유구의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는 『삼국지(三國誌)』가 수록되어 있다.10) 이를 근거로 『삼국지연의』 책판이 제주에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11) 그런데 서유구(徐有榘)의 『누판고(鏤板考』에는 제주목(濟州牧)에 『삼국지(三國誌)』65권 책판이 소장되어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들은 모두 『삼국지연의』가 아니라 진수(陳壽)의 정사(正史) 『삼국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기록상으로 제주판 『삼국지연의』의 판각 사실을 확인할 길은 없다.


(2) 『삼국지연의』 제주갑본(濟州甲本) 권12 분석

   기록이 없는 이상 간기를 추적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간기가 있는 『삼국지연의』 ‘제주갑본(濟州甲本)’을 분석하는 일이다. 책의 장황, 표지 배접지, 판각상태 등을 통해 고증해보고자 한다. 먼저 책의 장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수경실본 『삼국지연의』권12는 다행히 표지 원형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낙장은 없고, 책을 맨 끈만 떨어져나간 상태다. 표제는 ‘三國志 十二’라 되어 있고, 우측 여백에는 권12의 소제목들이 묵서되어 있다. 그런데 표지 문양이 귀갑문(龜甲紋)이다. 이 귀갑문은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에 많이 사용된 문양이다. 예를 들면, (사진3)은  표지에 귀갑문 문양이 사용된 『신각소판고본구해당시고취대전(新刻蘇板古本句解唐詩鼓吹大全)』인데, 표지 배접지로 쓰인 관문서에는 ‘康熙二十年三月二十二日行府使任’이라는 글자가 있어 1681년 이후에 간행된 책임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이 문양만으로도 어느 정도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표지 배접지이다. 뒷표지를 분해한 결과 호적대장과 목판으로 인쇄된 책장이 일부 나왔다. 호적대장을 분석한 결과 18세기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었다.12) 또 책장은 『울료자(蔚繚子)』의 일부였다. 현전하는 『울료자(蔚繚子)』 중에 제주 간기가 있는 판본은 남아 있지 않지만 『오자직해(吳子直解)』, 『삼략(三略)』 등 병서가 제주도에서 간행된 것으로 보아 『울료자(蔚繚子)』도 제주도에서 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책장 역시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 판각의 유형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수경실 소장 『삼국지연의』 제주갑본(濟州甲本) 권12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기에 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3) 강재열(姜再烈) 수택본(手澤本) 『삼국지연의』

   그렇다면 『삼국지연의』 제주갑본(濟州甲本) 간년의 하한은 언제일까? 강재열 수택본 『삼국지연의』를 통해 확인해보겠다. 현전하는 『삼국지연의』는 대부분 상태가 좋지 않다. 표지가 없어진 경우도 많고 책장이 탈락된 곳도 많다. 많이 본 책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장서인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기대승의 발언에서 보았듯이 유학자들은 정사(正史)인 진수(陳壽)의 『삼국지』와는 달리 『삼국지연의』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고, 공부에 방해되는 책으로 치부하였다. 당연히 유가(儒家) 경전(經傳)이나 역사서와는 달리 장서인을 찍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런데 최근 장서인이 남아 있는 『삼국지연의』가 발견되었다. 권10 한 책만 남아 있는데, 첫 번째 장 하단에는 ‘晉山後/人姜再/烈光甫’라는 인장이 남아 있다.(사진4) 강재열이 아주 이름 난 학자는 아니지만 그의 행적은 그와 재종간인 조선후기의 문신 강재항(姜再恒,1689∼1756)의 <재종형첨추공행상(再從兄僉樞公行狀)>에 잘 남아 있다.13) 행장(行狀)에 따르면 강재열(1647∼1729)은 자가 광보(光甫)이며 본관은 진산(晉山)이다. 아버지는 승사랑(承仕郞)을 지낸 강호(姜鄗), 조부는 산음현감(山陰縣監)을 지낸 강흡(姜恰), 증조부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낸 강윤조(姜胤祖), 고조부는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를 지낸 강덕서(姜德瑞)이다. 인조 25년(1647)에 춘양현(春陽縣) 성잠리(星岑里)에서 태어났으며, 독서를 할 때에도 장구(章句)에 힘쓰지 않고 전대(前代) 흥망의 사적을 즐겨 보았다. 육도(六韜) 삼략(三略)에 능통하였고, 선기옥형(璇璣玉衡)을 연구하였으며, 구장(九章)을 공부하였다.14) 일찍이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가 문교(文敎)를 숭상하고 무략(武略)을 하찮게 여기면서 조종(祖宗)으로부터 태평성대라고 불렀지만, 다급한 일이 좀 생기면 위아래가 모두 혼란에 빠져 스스로를 보전할 수 없었다. 임진(壬辰)년에서 병자(丙子)년에 이르기까지 패상(敗喪)이 계속되어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지만 조야(朝野)는 마음 편히 지내면서 병사(兵事)에 관해 말하기를 꺼린 지 수 십 년이 되었다. 옛 기록에 ‘나라가 크더라도 전쟁을 잊으면 위태롭다’라는 말이 있다. 지금 아주 막강한 적국이 날마다 틈을 노리고 있고, 국치(國恥)를 씻지도 못했는데, 변경을 막고 군사력을 정비하기에는 조금도 믿을 만하거나 적을 위협할 만한 게 없다. 내가 여기에 마음을 쏟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앞으로 세상의 필요에 응하기 위한 것이다. 나라에 변고가 없으면 그만이지만, 만약 변고가 있다면 나는 반드시 나가서 이를 막아낼 것이다.15)


이를 보면 강재열이란 인물의 사람됨을 알 수 있다. 그는 병서에 능통한 인물이었고, 이 때문에 『삼국지연의』도 열심히 탐독했던 것이다. 그 흔적이 그가 소장했던 『삼국지연의』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게다가 서미(書眉)에는 교정의 흔적이 남아 있어 판본을 연구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강재열 수택본과 선문대 중한번역문헌연구소 소장본의 몇 가지 차이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구 분

姜再烈 수택본

중한번역문헌연구소본

15a-12-24

15b-4-19

28판심하단

 

刀割의 흔적 있음

81b-1-釋義

陰刻

陽刻


인쇄 상태는 강재열 수택본이 선명한 데 반해 중한번역문헌연구소본은 흐리고 판독하기 어려운 곳이 많다. 게다가 81면에 보이는 ‘釋義’가 강재열 수택본은 음각으로 정교하게 새겨진 데 반해, 중한번역문헌연구소본은 양각으로 바뀌고 새김도 정교하지 못하다. 특히 28면 판심하단의 경우처럼 도할(刀割)의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는 강재열 수택본이 초간본이고 중한번역문헌연구소본이 복각본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15면의 글자 중에 완전히 다르게 새겨진 곳이 있다는 점이다. ‘誰’자는 ‘受’자로 ‘丙’자는 ‘內’자로 고쳐 새겼는데, 이는 오각(誤刻)이 아니라 교정(校訂)을 한 것이다. 즉, 제주도 간본의 오류를 복각하는 과정에서 바로잡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강재열 수택본은 『삼국지연의』 초간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즉, 『삼국지연의』 제주갑본은 강재열(姜再烈)의 몰년인 1729년 이전에 간행된 책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삼국지연의』 ‘제주갑본’은 1729년 이전의 정묘(丁卯), 즉 1687년에 간행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는 『삼국지연의』에 관한 기록이 집중적으로 등장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특히 『성호사설』의 기록과도 일치하는 사항이다. 이익(李瀷, 16811763)의 『성호사설』에는 『삼국지연의』의 유통에 관한 중요한 정보가 실려 있다.


선조 때 임금의 교서에 ‘장비의 대갈일성에 만군이 달아났다’는 말이 있었는데, 고봉 기대승이 나아가 말하기를 ‘『삼국연의』가 나온 지가 오래지 않으므로 신이 보지는 못했으나 후에 친구에게 들으니 허황한 말이 매우 많다고 하옵니다.’ 라고 하였다. 대개 이 책이 처음 나오자 임금이 우연히 언급한 것인데도 기고봉은 이렇게 아뢰었으니 참으로 체통을 얻었다 하겠다. 지금은 인쇄하여 널리 보급되어 집집마다 암송하고 과거장에서 시제(試題)로까지 올리며 부끄러운 줄 모르니 세태가 변했음을 알겠다.16)


송명흠(宋明欽,1705∼1768)의 기록 역시 당시 유행하고 있던 『삼국지연의』 유행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집안에 패서(稗書)와 잡희(雜戱)는 두지 않았다. 내가 어려서 독서를 좋아하지 않자 아버지께서는 “책을 보고 뜻을 풀어보는 것이 입으로만 읽는 것보다 나은데도 너는 알지 못하는구나.”라고 하시며, 나를 위해 『삼국지연의』를 사다주시고, 이를 통해 책 읽는 재미를 익히도록 하셨다. 17)


이 기록들은 당시 유통된 『삼국지연의』가 바로 ‘제주갑본’ 또는 ‘제주을본’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제주도에서 판각된 ‘제주갑본’이 과연 끝까지 제주도에 남아 있었는지는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제주도에서 간행된 책판의 일부는 뭍으로 옮겨와 보관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1680년에 간행된 안축(安軸)의『근재선생집(謹齋生集)』에는 ‘庚申冬刊于濟州移藏板本於羅州’라는 기록이 있다.18) 제주도에서 판각한 책판(冊板)을 나주(羅州)로 옮겨와 보관했던 것이다. 또 1701년에 간행된 신혼(申混,1624∼1656)의 『초암집(初菴集)』에는 ‘辛巳歲濟州牧開刊’이라는 간행기록이 있다. 하지만 『누판고』에는 책판이 해남현(海南縣)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는 인출(印出)의 편의를 위해 책판을 옮겨다 놓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이유로 상당한 책판이 뭍으로 옮겨졌으리라 추정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삼국지연의』 ‘제주갑본’ 또한 제주도에 계속 남아 있었는지 의문이 든다. 다만,『삼국지연의』 ‘제주을본’이 언제 어디서 판각되었는지는 여전히 숙제로 남는다. 판각 시기와 장소, 그리고 ‘제주갑본’이 판각된 후 시간이 얼마나 흐른 뒤에 복각이 이루어졌는지는 좀 더 많은 자료가 나타나야 할 것으로 보인다.



5. 결론


   제주판 『삼국지연의』에는 “歲在丁卯耽羅開刊”라는 간기가 있다. 그런데 간기의 ‘정묘(丁卯)’를 지금까지는 1567년 또는 1627년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병자자본 『삼국지연의』가 발견되면서 1567년설은 그 근거를 잃게 되었고, 1627년 간행설은 당시 출판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온 오류이다. 그 다음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게 1687년과 1747년이다. 하지만 강재열 수택본이 남아 있기 때문에 1747년설은 근거가 없게 된다. 따라서 제주판 『삼국지연의』의 간년은 1687년이라 할 수 있다. 이를 간기가 있는 『삼국지연의』의 분석을 통해서도 확인하였다. 즉, 표지 문양이 귀갑문인 점과 표지 배접지의 문서들을 통해 1687년 간행을 확인하였다. 한편 제주판 『삼국지연의』는 두 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다른 하나의 판본은 1687년에 간행한 제주판 『삼국지연의』를 그대로 복각한 것인데 간기가 없다. 따라서 1687년 간기가 있는 『삼국지연의』를 ‘제주갑본(濟州甲本)’이라 하고, 간기가 없는 판본을 ‘제주을본(濟州乙本)’이라 부르기로 한다. 다만, ‘제주을본(濟州乙本)’의 판각 시기, 장소 등에 관한 문제는 좀 더 많은 자료가 출현해야 분석이 가능해질 것으로 보인다.




(사진1) 간기 있는 제주판 『삼국지연의』. 수경실 소장.



(사진2) 제주판 『삼국지연의』 판본 비교.
           왼쪽부터 수경실, 아하실, 중한번역문헌연구소 소장본




(사진3)『新刻蘇板古本句解唐詩鼓吹大全』귀갑문 표지 및 배접 문서



(사진4) 강재열(姜再烈) 수택본의 장서인




1) 이에 대해서는 박재연 교수의 논문 「새로 발굴된 朝鮮 活字本 《三國志通俗演義》에 대하여」(『三國志通俗演義』,中韓飜譯文獻硏究所, 2010)에 자세하다.


2) 이에 대해서는 박재연 교수의 논문 「조선각본 《신간고본대자음석삼국지전통속연의》에 대하여」(중국어문학지 제27집, 2008.8.)에 자세하다.


3) 박재연 교수의 앞의 논문에 실린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였고, 수경실본과 국립청주박물관 소장본 및 선문대학교 중한번역문헌연구소 소장(권6,권7,권10,권11)은 필자가 새롭게 추가한 것이다.


4) 이에 관해서는 계명대학교 김영진 교수가 각수의 유무를 근거로 제주판 복각본의 복수 존재 가능성을 먼저 제기하였고, 박재연 교수는 위 논문에서 김영진 교수가 확인한 각수를 근거로 두 판본의 차이를 언급했지만 더 이상의 분석은 하지 못했다. 


5)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히 설명하기 어렵다. 책판의 소유가 바뀌면서 각수의 이름을 삭제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뿐이다.


6) 현전하는 책의 지질이나 장황의 상태를 보면 갑본(甲本)은 오히려 육지에서 인출된 느낌이 있으며, 을본(乙本)은 제주에서 인출된 느낌이 있다. 어쩌면 갑본은 제주에서 판각된 후에 책판이 육지로 옮겨졌을 가능성이 있고, 을본은 제주에서 판각되고 제주에서 인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추정일 뿐이지만 현재로서는 여러 가지 가능성이 남아 있다.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7) 鄭沃槿 교수는 《中國通俗小說在古代朝鮮的傳播和影響》(華東師大博士學位論文, 1997.)에서 1567년설을 주장하였고, 박재연 교수는 「조선각본 《신간고본대자음석삼국지전통속연의》에 대하여」(중국어문학지 제27집, 2008.8.)에서 1567년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박재연 교수는 이후 병자자본이 발견되면서 발표한 논문 「새로 발굴된 朝鮮活字本 《三國志通俗演義》에 대하여」(『三國志通俗演義』,中韓飜譯文獻硏究所, 2010.)에서 1627년으로 수정하였다.


8) 上御夕講于文政殿, 進講『近思錄』第二卷. 奇大升進啓曰: 頃曰張弼武引見時, 傳敎內張飛一聲走萬軍之語, 未見正史, 聞在『三國志衍義』云. 此書出來未久, 小臣未見之, 而或因朋輩間聞之, 則甚多妄誕. 如天文地理之書, 則或有前隱而後著史記, 則初失其傳, 後臆度而敷衍增益, 極其怪誕. 臣後見其冊, 定是無賴者裒雜言. 如成古談, 非但雜駁無益, 甚害義理. 自上偶爾一見, 甚爲未安. 就其中而言之, 如董承衣帶中詔, 及赤壁之戰勝處, 各以怪誕之事, 衍成無稽之言. 自上幸恐不知其冊根本, 故敢啓. 非但此書, 如『楚漢衍義』等書, 如此類, 不一無非害理之甚者也. 詩文詞話, 尙且不關況,『剪燈新話』·『太平廣記』等書, 皆足以誤人心志者乎. 自上知其誣而戒之, 則可以切實於學問之功也.

   又啓曰: 正史則治亂存亡俱載, 不可不見也. 然若徒觀文字而不觀事跡, 則有害也. 經書則深奧難解, 史記則事迹不明, 人之厭經而喜事, 擧世皆然. 故自古儒士, 雜駁則易, 精微則難矣.『剪燈新話』鄙褻可愕之甚者, 校書館私給材料, 至於刻板, 有識之人, 莫不痛心, 或欲去其板本而因循至今, 閭巷之間, 爭相印見, 其男女會淫神怪不經之說, 亦多有之矣.『三國志衍義』則怪誕如是, 而至於印出, 其時之人豈不無識. 觀其文字亦皆常談, 只見怪僻而已.


9) 유탁일 교수는 「《三國志通俗演義》의 傳來版本과 시기」(『碧史李佑成先生停年退職紀念國語國文學論叢』,여강출판사, 1990.)에서, 민관동은  「《三國演義》의 국내 유입과 판본연구」(『중국고전소설의 전파와 수용』,아세아문화사, 2007.10.)에서 각각 1627년설을 주장했다.


10) 남권희,「濟州道 刊行의 書籍과 記錄類」,『古印刷文化』제8집, 淸州古印刷博物館, 2001.


11) 이은봉의 「《三國志演義》之受容樣相硏究」(인천대박사학위논문,2006.12.)와 박재연 교수의 「조선각본 《신간고본대자음석삼국지전통속연의》에 대하여」(중국어문학지 제27집, 2008.8)가 대표적이다.


12) 이에 대해서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전경목 선생님의 도움을 받았다.


13) 姜再恒,立齋先生遺稿』卷十九, <再從兄僉樞公行狀>.


14) 姜再恒,立齋先生遺稿』卷十九, <再從兄僉樞公行狀>. “我仁祖二十五年丁亥四月四日, 生公于春陽縣星岑里寓第, 祖母沈氏淑人養視之, 及長, 姿狀雄偉深沉, 有局度, 喜怒不形於色, 常有大志. 讀書不治章句, 好觀前代興亡之蹟, 通鞱略, 究璣衡, 治九章.”


15) 姜再恒,立齋先生遺稿』卷十九, <再從兄僉樞公行狀>. “我國家尙文敎而遺武略, 自祖宗號爲極治之世, 而少有警急, 則上下波蕩, 不能自保. 自壬辰至丙子, 喪敗相仍, 至今未弭, 而朝野恬嬉, 諱言兵事者數十年. 前志有之曰:‘國雖大, 忘戰則危.’ 當今勁敵之人, 日伺間隙, 且國耻未復, 而所以扞邊圉飭戎備者, 無毫髮可恃而威敵者, 吾所以汲汲於此者, 將以應世需也. 國家若無變則已, 若有之則吾必出而當之矣.”


16) 宣廟之世, 上敎有張飛一聲走萬軍之語. 奇高峰大升進曰: “『三國衍義』出來未久, 臣未之見, 後因朋輩聞之, 甚多誕妄”云云. 蓋此書始出, 而上偶及之. 高峰之啓, 眞得體矣. 在今印出廣布, 家戶誦讀, 試場之中, 擧而爲題, 前後相續, 不知愧恥, 亦可以觀世變矣.


17) 宋明欽,『櫟泉先生文集』권18, <皇考默翁府君遺事>. “家中不畜稗書及雜戲. 明欽幼不喜看書, 府君謂“看書玩繹, 有愈於口念, 而汝反不知.” 爲市三國演義, 俾由此習繙閱之味.”


18) 남권희,「濟州道 刊行의 書籍과 記錄類」,『古印刷文化』제8집, 淸州古印刷博物館, 2001.